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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Letter VoL.08]PEOPLE_최정은 임상교수

작성자
리걸 클리닉센터
작성일
2022-03-23
조회
7
이 코너는 공익법률센터 사람들의 면면을 알아보는 People 코너입니다 

인터뷰어인 김상철 공익조교(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공익법률센터의 최정은 임상교수 만나보았습니다.


 


Q. 안녕하세요, 교수님! 이번에 인터뷰를 맡게 된 13기 김상철입니다.   

A. 네, 반갑습니다. 기수를 말씀해주셨는데 저도 보통 소개할 때 습관적으로 사법연수원 기수를 덧붙여왔던 사람이라…. (웃음) 저는 사법연수원 35기 최정은입니다. 임상부교수로 이번 학기 3월 1일 자로 임용을 받아서, 이번 학기에 ‘최고법원 클리닉’과 ‘노동법 클리닉’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Q. 말씀해주신 대로 이번에 임상교수로 새롭게 부임하셨는데요. 학교로 오시기 전에는 어떤 일을 하셨었는지 궁금합니다.

A. 저는 사법연수원 35기를 수료하고 판사로 임용을 받아서요. 2006년, 2007년, 2008년을 대구지방법원에서 판사로 근무했어요. 그리고 2009년부터는 법무법인 화우로 자리를 옮겨서 노동팀과 행정팀 소속으로 송무와 자문 업무를 수행했습니다. 물론 그전에 판사 재직 경력이 있다 보니 일반 민ㆍ형사 사건 업무들도 꽤 했는데요. 말하자면 전문 분야로서 소속은 줄곧 노동팀이었고, 하나 더 추가해서 행정 관련한 일도 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렇게 쭉 근무를 하다가 해외연수를 다녀오게 됐고, 그 후에 다시 조금 더 일을 하다 2018년부터 대법원의 재판연구관으로 채용되었고요. 그때부터 4년간, 2022년 2월 4일까지 대법원 공동조 중에서 근로조에 소속이 되어서 상고심 재판연구 업무를 수행하다가 퇴직을 하고 학교로 오게 되었습니다.

 

Q. 인터뷰를 준비하면서는 판사 경력과 재판연구관 채용에 대한 기사를 주로 접했었는데요. 변호사로서 활동한 기간도 상당하시네요.

A. 길죠. 저도 그렇게까지 생각을 안 해봤는데, 한 9년 정도 한 것 같아요. 근데 그사이에 한 3년간 미국에 있었어요. 해외연수, 임신, 출산 이런 것도 있었고….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배우자가 주재원으로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겸사겸사 같이 3년간 미국에 체류를 하게 되었고요. 그러고 나서 돌아와서 다시 업무를 하다보니까 상당한 기간이 되었네요. 저는 그 기간 중 거의 대부분을 어쏘 변호사(associate lawyer)로 일을 했는데, 쉽지는 않았습니다. 전해 들어서 아실 수도 있겠지만 대형 로펌 변호사 일이 굉장히 좀 고되죠. 겉으로 보기에는 참 화려하고 멋진 것 같지만, 그것을 채우고 있는 업무들은 상당한 고뇌와 체력을 요구하거든요. 물론 늘 그랬다는 건 아니고요. (웃음) 근데 그런 과정이 있었으니까 또 그 분야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죠. 굉장히 좋은 경험을 할 수 있게 해준 곳이고, 저를 키워준 곳이기도 합니다.

 

Q. 변호사로서 활동하는 것 외에 판사ㆍ재판연구관을 꿈꾸거나 그에 관심을 두고 있는 학생들이 꽤 있을 것 같은데요. 직업으로서 판사와 재판연구관은 어떻게 소개할 수 있을까요? 

A. 직업으로서의 판사…. 참 좋은 직업입니다. 재판연구관도 마찬가지고요. 어느 한쪽의 이해관계를 대변하지 않아도 되어서, 본인이 생각하는 바에 따라서 결론을 내릴 수 있죠. 그런 점에서 무언가에 나를 맞춰야 한다는 그런 어떤 압박이라고 할까요? 그런 강박 같은 것에서 좀 더 자유로울 수 있는, 지적 자율성을 확보할 수 있는 직업이라는 점에서 굳이 상대적으로 비교를 하자면 다른 법조직역에 비해서 좋은 직업이다…. 오해의 소지는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다른 직업이 나쁘다는 게 아니고요. (웃음)

   그런데 두 직업이 조금 다른 면은 있어요. 판사와 재판연구관을 굳이 놓고 따져본다면 판사는 뭐랄까, 자기의 이름을 걸고 자기 책임 하에 주어진 어떤 사건에 대해 적절하고 타당한 결론을 내립니다. 그래서 꼭 확정 판결은 아니더라도 자기가 맡은 사건에 대해서 어떻게든 매듭을 짓는다는 측면이 강조되고요. 하지만 무한정 제약이 없는 것은 아니죠. 당연히 헌법과 법률, 그 이하의 법령들 이런 것들이 판단의 근거가 되어야 하고 그다음에 그것을 해석한 기존의 선례들을 바탕으로 해야 하죠. 그런 점에서 완전히 구속력이 없는 아주 자율적인 지적 활동을 한다고 볼 수는 없죠.

    재판연구관의 연구 업무는 자기 이름은 안 나가지만 대법원이라는 상급심 최고법원에서 판결을 형성하는 데 일조하죠. 사건을 검토한 다음 기존의 법리에 따라서 해결할 것인지, 기존 법리를 수정ㆍ보완하여 적용할 것인지 등을 조사ㆍ연구하고 그 결과를 대법관님들께 제공해드리는 그런 역할을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큰 틀에서 보자면 재판연구관도 분쟁 해결과 관련된 일을 하지만, 일선 하급심의 판결이나 결정을 담당하는 판사의 일반적 역할과는 조금 구분된다 하겠습니다.

   재판연구관은 사실 판사랑 비교하는 게 적절할지 모르겠는데, 그전에는 판사님들이 다 재판연구관을 하셨거든요. 그래서 판사의 어떤 업무 배정 중에 하나라고 그럴까요, 보직 중에 하나라고 그럴까요. 그렇게 비유를 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판사뿐만 아니라 변호사나 교수 등 다양한 직역에 있는 분들도 재판연구관으로 일할 수 있게 문호가 넓어졌죠. 그래서 이제는 재판연구관의 역할도 보다 다양한 배경과 경험을 가진 분들이 수행하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가 바로 직전에 재판연구관을 하다 와서 그런지 이 질문에 여러 가지 생각이 많이 떠오르는데요….

 

Q. 어떤 이야기일지 정말 궁금하네요. 말씀 부탁드립니다!

A. 재판연구 업무가 사람마다 약간 호불호라고 해야하나, 그런 게 조금 나뉘는 것 같아요. 일반화하기는 어려운데요. 선생님들 중에는 다른 누군가의 판단을 돕기 위해서 사안을 검토하고 보고서를 작성하는 등의 업무가 자신과 맞지 않다고 하시는 분들이 계시거든요. 자기는 특정 사건에 대해서 결론이 a라고 생각하는데, 왜 b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상정해서 그에 맞는 증거나 기존 선례ㆍ정책 같은 것들을 보고서에 담아내야 하는 것인지 그런 부분들에서 불편함을 느끼시는 거죠. 적지 않게 있으십니다.

   반대로 결론을 내려야 한다는 것을 굉장히 부담스러워하는 경우도 있어요. 변호사나 교수 출신의 재판연구관님들이 조금 그런 경향이 있는 것 같은데요. 사건의 결론에 재판연구관의 이름이 담기는 것은 아니지만, 검토를 해보니 이 사안은 이쪽으로 가는 게 맞는 것 같다는 견해가 표현되고 그게 반영이 되어서 보고서가 나오는 경우가 많죠. 그러다 보니까 그것 자체를 부담스러워하시기도 해요. 그냥 차라리 원고나 피고 한쪽에 부합하는 근거들을 찾아내라고 하면 모르겠는데, 51 대 49 같아 보이는 어려운 사건에서 타당한 결론을 내야 한다는 생각이 드니까 압박을 느끼는 것이죠.

   그다음에 판사나 재판연구관의 업무에 대해 사족을 좀 붙이자면, 너무 진지하게 얘기하는 것 같기도 한데요. (웃음) 두 업무 다 결국은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서 현재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거죠. 그래서 ‘이 사건은 어떤 사건이다’ 그리고 ‘이렇게 결론이 나야 되는 게 맞다’ 등등의 결론을 내리는 과정에 동참하고 큰 틀에서 역할을 분담하게 되는 건데요. 이것을 걸어갈 길을 위해 돌을 놓는 과정에 비유해보고 싶어요. 돌을 어떤 방향에 어느 정도의 거리에 놓아야 하는지, 혹시 놓지 않고 뒤에 쌓아두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등등을 순간순간 결정해야 하는 거죠. 누구나 예쁘고 훌륭한 발판이 될 돌을 앞에다가 딱 멋지게 놓고 싶죠. 근데 그런 돌만 있는 게 아니거든요. 무겁고 막 되게 못생긴 돌도 많이 있거든요.

   그리고 내 생각하고 내 옆에서 일하고 있는 내 동료의 생각, 그다음에 나보다 먼저 법조계의 길을 걸은 선배들의 생각이 다 다르기도 하고요. 이렇게 돌을 보는 시선도 다 다른데 그런 와중에 지혜를 잘 살려서, 동시대에 시대 정신을 반영해서 적절하게 돌을 하나씩 놓아나가야 하는 거에요. 참 어려운 작업입니다. 그 일을 여러분들이 선택한다면, 굉장한 인내와 끈기를 요구하는 작업이 될 거에요. 화려하고, 주목을 받을 수 있고, 남들이 우러러보는 그런 직업이라는 것에 도취되지 않고 그 힘든 일을 묵묵하게 해낼 수 있는 분들에게 적합한 직업과 업무가 아닐까 싶네요.

 

Q. 여러 업무를 거치며 긴 시간 노동이나 행정 분야에서 전문성을 쌓아오셨는데요. 기억에 남는 일화나 경험이 있으신지 여쭙고 싶습니다.

A. 의미가 깊었던 기억들을 중심으로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지금 돌아가신 이홍훈 전 대법관님께서 대법관 마치시고 좀 지나서 화우에 오셨는데요. 공익 활동에 굉장히 관심이 많으셨어요. 그래서 여러 활동을 많이 기획하시고 또 법인 내부에서 그 활동이 가능하도록 독려를 해주셨었죠. 이후에는 화우 공익법률재단을 설립하시기도 했고요. 공익변호사도 상근 변호사로 한 분을 채용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때가 로펌이 공익 활동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한 초창기였어요. 그런 과정에서 참여하면서 여러 공익 사건을 맡았던 것이 기억에 남네요. 외국인 노동자 상담 활동, 시리아 난민 인정신청 지원 활동, 동물보호단체 사기사건 소송대리 활동 등을 했었죠.

   동물보호단체 사건은 한 동물보호단체가 동물 구호를 위해 사용할 차량을 구입하는데 한국 업체에게 사기를 당한 사안이었어요. 1심을 시군 법원에서 진행하다가 지고 항소심에 올라간 사건이었는데요. 그 당시에 화우 공익재단의 전신인 공익위원회 차원에서 소송을 맡았는데, 너무 화가 나더라고요. 그래서 하버드 로스쿨 수료하신 외국변호사님과 합심을 해서 여러 가지 진술서도 받고 자료도 찾아내고 번역도 해가면서 열심히 싸웠습니다. 시군 법원에서 올라온 사건이니까 상대방 업체도 굉장히 영세하고 그랬어요. 항소심은 의정부지방법원에서 했는데요. 변론기일에 재판부가 귀찮은 듯한 태도로 빨리 끝내려고 하는 것을 제가 막 싸워가면서 결국 이겼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이런 활동들이 사실은 로펌 소속 변호사로 일하면서 하기가 쉽지는 않아요. 왜냐면 시간을 내는 것 자체가 도전이거든요. 그렇지만 짬짬이 그런 활동을 하다 보면 뿌듯한 경험을 쌓게 되고 그렇습니다. 재판연구관 하면서는 사실은 좀 제한적인 면이 있어요. 공무원이기 때문에 다른 활동을 하기가 어려워서 그런데요. 하지만 다른 방식, 그러니까 학회 내지는 세미나 같은 것들을 외부하고 연계해서 할 수 있고 그렇거든요. 그런 곳에 발표자 또는 토론자로 참여해서 그간의 대법원 사건이나 여러 실무 경험을 기반으로 가지고 있는 생각을 풀어내는, 그런 활동의 기회가 조금 있습니다. 다만 이런 기회들은 그저 수동적으로 주어지는 건 아니고 자기가 관심을 가지고 찾아나서야 되긴 합니다.

 



 

Q. 말씀해주신 경험들은 이번 질문과도 연결점을 가질 것 같은데요. 구체적으로 어떠한 계기로 임상교수로 부임하시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A. 그렇네요. 대법원에서 재판연구 업무를 시작한 것부터 말씀을 드려야 될 것 같아요. 변호사로 일하면서 노동 사건들을 많이 해오다 보니까 그 분야의 전문성을 더 키우고 싶다는 생각을 늘 갖고 있었어요. 그에 따른 노력을 기울여왔고요. 그런데 2018년이 되기 전에, 2017년 한 11월쯤엔가 대법원에서 처음으로 근로조라는 걸 만든다는 소식이 들려왔죠. 재판연구관실은 공동조가 여러 개로 나뉘어 있는데요. 민사조ㆍ형사조ㆍ조세조 이렇게 분야별로 나뉘어져 있는 건데, 거기에 원래는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던 근로조를 만들겠다는 것이었어요. 외부 변호사를 두 명 채용해서 연구관으로 임용하겠다는 계획이 나와서 지원을 하였고, 다행히 운이 좋게 업무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업무가 굉장히 좋았어요. 잘 아는 모 부장판사님께서는 제가 너무 부럽다고, 어떻게 이렇게 하루 종일 노동 분야 판결을 위해서 계속 논문을 보며 연구할 수 있냐고 하셨었죠. 4년간 열심히 한다고 했습니다. 나름 보람도 있었고 근로조가 독립을 하다 보니까 관련한 판결들도 그사이에 굉장히 많이 나왔어요. 거기에 저도 많이 일조했다고 생각하고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이 재판연구 업무를 계속 열심히 하려면 체력을 너무 필요로 해요. 저도 체력이 되게 좋은 편인데 힘들더라고요. 대법원이 사회적 의미를 갖는 판결을 낼 때마다 굉장히 다양하고 깊은 고민과 첨예한 갈등을 다루게 되기 때문에 소진이 좀 돼요.

   그래서 3년을 하고 나서 어떻게 할까 고민을 했죠. 당시에는 그래도 내가 해온 것이 있고 또 사회에 일조할 수 있다는 보람이 있으니까, 속으로 열심히 해보자고 다짐을 하면서 재지원을 했어요. 그리고 다시 임용을 받았죠. 외부에서 채용한 재판연구관은 3년이 차면은 다시 임용절차를 밟게 되어있거든요. 그런데 할 수 있을 줄 알았더니 4년 차 되니까 되게 힘들더라고요. ‘그만 마무리해야 되겠다.’ ‘더 하라면 할 수는 있겠고 물론 이 업무가 참 좋기도 하지만, 마무리해야 되겠다.’ 그때 그런 생각을 했어요. 또 다른 시각과 경험을 가지신 분들이 새롭게 오셔서 연구 업무를 경험해 보시고, 판결이 나는데 일조하시고 하는 게 좋으니까. 그런 순환이 필요한 것 같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어요.

   그러고 나서는 어떤 직역 내지는 어떤 업무를 해야 할까 고민했는데, 많이는 못했어요. 솔직히 말하면은 업무가 계속 있다 보니까 정작 자기 일은 못 챙기는 거예요. (웃음) 그런데 이전에 변호사 하면서도 늘 관심을 가졌었기도 하고, 제 주변 친한 분들 중에 이런 활동에 종사하시는 분들도 많기도 한 상황이었거든요. 그렇게 마침 고민할 무렵에 임상 교수 지원 공고가 있었습니다. 주변 분들도 지원을 해보는 게 어떻겠냐 말씀을 해 주시고, 특히 노동법 관련한 경력을 가지고 있는 제가 임상교수로서 가는 게 학교에도 이로울 것이란 응원을 많이 해주셔서 그에 힘입어 지원을 하게 되었어요.

  그전에 재판연구관을 하면서 노동법으로 여기 서울대 전문 박사 과정을 수료하기도 했습니다. 코로나 사태가 터지면서 학교에 자주 오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전문박사과정을 거치면서 여기 계시는 소라미 교수님, 김남희 교수님과 같은 수업을 듣기도 하고 그랬어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어떤 일을 하시나 간접적으로 옆에서 보고 듣고 한 게 계기가 된 것도 같아요. 자연스럽게 이쪽으로 길이 나는 그런 효과가 있었달까요.

 

Q. 부임 후에는 임상법학 과목 중에서도 ‘최고법원 클리닉’과 ‘노동법 클리닉’을 맡아 강의를 이끌어주고 계신데요. 각각 어떤 내용과 특성을 가진 수업인지 소개를 부탁드리고자 합니다.

A.'최고법원 클리닉’은 학교에 임상법학 과목이 처음으로 개설되면서 함께 개설된 강좌 중에 하나죠. 예전에 김주영 변호사님께서 이 강좌를 맡으셨던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래서 제가 오면서 새로 만들어진 강좌는 아니고 기존부터 존재했었던, 의미가 깊은 클리닉 강좌입니다. 그걸 제가 이어받아서 하게 됐고요. 제가 직전에 대법원에서 재판연구 업무를 했다는 게 크게 작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최고법원은 당연히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인데요. 변론은 진행하지 않고 서면 심리를 원칙으로 하는 상고심과 헌법재판의 특성을 고려해서 관련한 실제 사건 중 하나를 가지고 법리적 쟁점의 검토와 서면의 제출, 그리고 나아가 판결과 판례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 과정에 참여한다는 의미가 있는 강좌입니다.

   다만 제가 대법원에 있었다 보니 저에게 1년인가 법률상의 수임 제한이 있어요. 그래서 직접 어느 상고심 사건의 한쪽을 대리하는 걸 할 수는 없고, 미국의 연방대법원 사건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처럼 참고인 의견서(amicus brief) 같은 것을 내는 제3자적 방식을 고려하고 있어요. 일종의 법정조언자 역할로 관련 사건의 특정 쟁점에 대해 학생들이 진지하면서도 새로운 시각을 담아내 본다는 큰 틀 안에서 진행을 하고 있고요.

   ‘노동법 클리닉’은 임상법학 과목의 또 다른 취지를 살리기 위한 강좌가 아닐까 하는데요. 임상법학 강좌의 취지 중에는 우리 로스쿨 학생들이 실제 사건을 경험한다는 실무적인 의미도 있지만, 인권을 대변해본다는 공익적인 의미도 있거든요. 공익과 관련된 사건을 해보면서 어떤 ‘공익적 마인드’를 키워나간다는 취지가 있는 건데요. 그런 측면에서 이미 굉장히 훌륭한 여러 강좌들이 개설되어 있지만, 노동 사건을 직접 다루는 강좌는 개설이 안 되어 있었던 걸로 알아요. 그래서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제 경험을 담아내어서 특정 사건을 구체적으로 다뤄보자는 차원에서 ‘노동법 클리닉’이라고 강좌명을 붙여봤고요. 지금 강좌에서는 방송계 종사자의 근로자성 인정 여부를 쟁점으로 해서 다른 지역의 공익변호사 단체가 진행하던 소송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진행을 하고 있습니다.

 

Q. 돌이켜보기엔 너무 짧은 시간이긴 하지만, 수업을 준비하고 진행한 소감이 어떠신지 듣고 싶습니다.

A. 일단 제가 너무 어리버리한 상태여서 우리 학생들이 저렇게 어리버리한 사람이 와서 잘 되겠냐는 생각을 혹시 하지 않을까 하는 상당한 두려움을 좀 가지고 있고요. (웃음) 임상법학 과목을 기존부터 해오신 분들의 도움을 받아서 해나가고 있습니다. 저만 잘 적응하면 궤도에 올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어쨌든 적응해가는 과정에 있네요.

   이건 말씀드려볼 수 있을 것 같아요. 학생분들을 도와드리고 싶은 마음, 제가 갖고 있는 것을 공유해서 어떻게든 실무적 감각과 공익적 마인드의 함양에 도움이 되고 싶은 의지는 굉장히 크다는 점을 좀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런 생각으로 매 수업을 떨리는 마음으로 임하고 있거든요. 심지어는 월요일 수요일 수업 전날이면 잠이 안 와요, 아직은. 다른 수업도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 그래도 이번 학기에는 많이들 수강 신청을 해주셔서 그 호응에 교수들이 오히려 더 힘을 얻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런 관심에 부응하고자 강의 준비도 좀 열심히 하고 있고요. 제일 중요한 부분인 사건의 선정 등에 있어서도 고민을 많이 했죠.

   그런데 하나 좀 걱정되는 부분은, 다른 교수님들도 공감을 하시고 다 같이 겪고 있는 문제인데요. 실제 사건을 가지고 진행을 하다 보니까 교수가 주도적으로 스케줄링을 할 수가 없다는 한계가 있어요. 그런 면에서 임상법학 과목이 아닌 다른 강의와는 조금 차이가 나지 않을까 합니다. 그래서 학생들이 조금 답답하다, 내실이 없다, 부실하다, 허술하다 이런 식의 느낌이 들 수 있는 강좌가 아닌가 하는데요. 하지만 그게 오히려 임상법학 과목의 매력일 수도 있으니까요. 우리 학생들이 S/U의 장점을 십분 이용하셔서 적절한 시간을 투입하시되 역동성과 유연성을 즐기실 수 있도록,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많은 것들을 배워나가실 수 있도록 노력하고자 합니다. 

 

Q.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 추상적인 질문 하나를 드려보고자 합니다. 진로ㆍ활동 분야 등과 관련하여 ‘공익’이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는데요. 사람에 따라 그 의미를 달리하여 표현할 수 있다는 생각을 종종 하곤 합니다. 교수님께서 생각하시는 ‘공익’, 그리고 법률가의 ‘공익활동’이란 어떤 의미인가요?

A. 굉장히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네요. (웃음) 추상적인 얘기가 될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요. 저는 인간의 존엄성을 증진시키는 것이 공익이 아닐까 생각이 드네요. 공익을 사익에 반대되는 개념이라고만 하기도 좀 안 맞는 부분이 있거든요. 그렇다고 많은 사람한테 이득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이라고 규정짓기도 참 뭐하고 말이죠. 또 제가 느끼기에는 소수자나 약자를 위한 활동이라고만 하기에도 너무 제한적으로 의미를 규정짓는 것 같고 그렇습니다. 

   특히 사익과 관련하여서는, 꼭 사익을 희생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게 공익이라고 이분법적으로 말하는 게 적절치 않은 것 같아요. 물론 어떤 활동에 있어서 누군가의 사익이 희생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익이라는 개념의 의미 자체를 사익과 반대되는 곳에 놓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사익을 해치지 않거나 오히려 증진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의 인권적 상황을 개선할 수 있는 경우도 충분히 상정할 수 있는 거거든요.

   나아가 공익은 시대적 배경이나 사회가 처한 구체적인 상황 등에 따라서 범위나 그 내용이 달라질 수 있는 역동적이고 유동적인 것이라고 봐요. 약자나 소수자의 상황을 대변하고 개선하려는 활동이 공익 개념에 포함되는 것 자체는 의문의 여지가 없을 것 같은데요. 하지만 그것에 꼭 한정해야 할 필요도 없지 않을까 해요. 예컨대 사회에 아주 많은 다수의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모든 이들에게 최선이 아닌 경우, 기존의 방식과 다른 쪽으로 가는 게 오히려 다수의 사람들의 기존 상황이나 인식을 장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방향인 경우 그것 역시 공익 활동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어떻게든 이야기해봤는데, 참 어렵네요. (웃음)

 

Q. 인터뷰를 마치기에 앞서 마지막으로 학생들에게 전하거나 조언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시다면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A. 무슨 얘기를 해야 할까요. 교수들을 많이 좀 괴롭혀 주세요. (웃음) 이게 제가 처음 와서, 잘 몰라서 하는 말이라 나중에 한 학기 정도 지나보면 다른 말을 할 수도 있긴 한데요. 학교에 교수님들이 많이 계시지만 사실 학생들이 없으면 교수가 필요 없죠.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하거든요. 학생들이 학교에서 우리와 같이 있으면서 서로 도움이 되고 그래야 할 것 같은데요. 최근에 코로나 상황이나 사회적인 흐름 이런 것들이 뭐랄까, 적극적인 지적ㆍ인적 교류를 활성화하는 분위기는 아닌 것 같아요. 이 상황 자체가 조금 소극적인 상태에 있다, 그런 느낌이 좀 있거든요.

   더 활발해졌으면 하는 것 중 제일은 당연히 강의와 같은 본연의 활동이지만, 지식을 익히는 것 외에도 공익 활동을 포함해서 학습에 수반되어야 할 여러 활동들 역시 함께 활성화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를 위해 우리 교수들을 많이 괴롭히고 잘 써먹으시라,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참, 표현을 좀 고급스럽게 써야 할 텐데요. (웃음) 대부분의 교수님들은 전임교수님들 또 임상교수님들 다 포함해서 그런 측면에서 준비가 되어있으신 분들 같거든요. 의지도 많이 있으시고. 그래서 앞서 말씀드린 활동들이 활발해지면 질수록 좋을 것 같다, 그런 생각입니다. 너무 두려워하지 말고 어떤 것이라도 그냥 교수에게 물어보고 뭐 해달라고 요청하고…. 뭐랄까, 그런 주고받음이 있으면 좋겠어요. 이것도 너무 추상적이네요.

   아, 건강을, 건강을 잘 챙겨야 해요. 육체적인 건강도 중요하지만 정신건강을 특히 잘 챙기길 바라요.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고 하는데, 코로나 상황에서 아무래도 움츠러져 있을 수밖에 없다 보니 정신적인 건강에 적신호가 켜지는 일들이 생기는 것 같아요. 저도 예외가 아닐 것 같은데요. 꼭 심각한 수준의 이상이 아니더라도 저마다의 방법으로 마음을 잘 돌보면서 학습과 업무를 해나가면 좋겠습니다.

 


인터뷰어 : 김상철 공익조교 (법학전문대학원 2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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