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

[News Letter VoL.10]PEOPLE_김인희 지도변호사

작성자
리걸 클리닉센터
작성일
2022-09-22
조회
11
이 코너는 공익법률센터 사람들의 면면을 알아보는 People 코너입니다 

인터뷰어인 양현준,신유준 6기 공익조교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공익법률센터의 김인희 지도변호사 만나보았습니다.

 

 

 


 

Q. 김인희 변호사님 안녕하세요! 인터뷰를 맡게 된 신유준, 양현준입니다. 1학년 때 프로보노 활동을 기획하면서 처음 뵈었고, 이렇게 계속 연을 이어나가게 되어 좋습니다. 뉴스레터 독자들에게 간단하게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공익법률센터에서 지도변호사로 일하고 있는 김인희입니다. 센터에서는 프로보노 활동 관련 업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Q1. 변호사님은 기자생활을 하셨던 것으로 알고있는데요, 기자생활을 하시다가 변호사가 되어야겠다 결심한 계기가 있으실까요? 

저는 학부 전공이 국문과였고 어렸을 때부터 기자가 꿈이었어요. 오랫동안 꿈꿔왔던 일을 그만두게 된 데에는 정말 많은 이유가 있었고요. 가장 큰 이유는 제가 꿈꿨던 일과 경험했던 일의 차이가 컸기 때문이었어요. 기자는 펜으로 사회 정의를 실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저는 제대로 이루지 못했던 것 같아요.

 

저는 광화문이 하루도 조용하지 않았던 시기에 기자 생활을 했었는데, 정작 저는 앉아서 매일매일 기사를 처리하는데 급급해서 뭐 하나 제대로 알지 못한 채로 마감만 쳐내고 있게 되더라고요. 제가 배정되었던 부서의 역할 때문이기도 했지만, 기대했던 것만큼 사람들과 현장에서 함께하지 못한 채 깊이 없는 생활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오히려 그 시기에 광화문에서 많은 사람들이 집시법 위반으로 체포되고 기소되고 있었는데, 그때 뜻있는 변호사들이 현장에서 시민들을 법적으로 지원하고 있더군요. 그 모습을 보며 변호사가 되면 정말 도움이 필요한 한 사람 한 사람을 도와줄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Q2. 변호사님은 공익법률센터에 오시기 전까지 국회 의원실 비서관으로 입법 활동에 참여하시거나,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 조사관, 서울대학교 인권센터 전문위원으로 활동하시는 등 일반적인 송무업무가 아닌 다양한 활동들을 해오셨는데요. 변호사로서 그러한 직역에서 일을 하시면서 느끼신 점이 있으실지 궁금합니다. 

 

1. 국회

변호사가 되기 전부터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는 분들로부터 모든 활동의 끝은 입법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고, 로스쿨에 다니는 동안에도 입법기관인 국회에 관심이 있었어요. 대부분의 사회운동의 종착점에는 법적으로 운동의 결과를 안착시키는 데 있기 때문에, 이런 과정에 참여하며 입법기관에서 변호사로서 역할을 하고 싶었고, 또 많은 사회적 의제가 역동하는 현장을 경험해보고 싶기도 했어요.

전통적인 변호사 직역은 아니더라도 변호사가 꼭 필요한 곳들이 굉장히 많고, 저는 그러한 대표적인 공간이 국회라고 생각해요. 국회는 정치를 하는 곳이기도 하지만 그에 앞서 법을 만드는 곳이잖아요. 보좌진들이 법을 정말 잘 알아야 되는데 사실 시간도 부족하고 일이 너무 많아요. 저는 법제사법위원회 소속 의원실에서 일했었는데, 법사위는 모든 상임위의 법률을 마지막으로 검토하는 곳이어서 정말 다양한 법과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을 만날 수 있었어요. 국회 보좌진은 변호사가 아니어도 할 수 있고, 변호사라고 모든 법을 다 알 수는 없지만, 변호사 자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보좌진이 된다면 입법과 정책 업무에서 큰 장점을 발휘할 수 있다고 봐요. 법조인으로서 훈련 받았기 때문에 기본적인 법의 원칙, 해석, 작동 원리에 대해 알고 있고, 기본법들이 가지고 있는 기준과 흐름을 이해하고 있고, 그래서 처음 본 법이라도 일단 읽고 해석하고 검토할 수 있는 능력을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게 변호사의 장점인 것 같아요. 가끔은 법 체계상 균형이 맞지 않거나 해석상 문제가 될 수 있는 입법이 되는 경우도 있는데, 변호사들이 더 많이 진출해서 좀 더 나은 입법안을 만들고, 수 많은 제개정안들을 제대로 읽고 검토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2. 세월호 특조위

 

세월호 특조위에서 일하게 된 데에는 개인적인 동기가 컸어요. 저는 3회 변호사시험을 봤는데, 그때가 2014년이었어요. 그동안 저도 학부 시절부터 언론고시 준비, 기자 생활, 다시 로스쿨 생활과 변호사 시험까지 쉬지 않고 20대를 보냈고, 마침내 모든 과정이 끝나고 합격자 발표까지 나자 너무 홀가분하고 행복했어요. 합격자 발표 후 집 밖에 나갔는데 날씨도 정말 좋고 벚꽃이 만개해 있었어요. 그때 정말 봄이 너무 아름답고 행복하다고 느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요.

 

그런데 바로 며칠 후 아침에 일어났는데 세월호가 침몰하고 있다는 거예요. 전원구조 속보도 보고, 금방 구하겠지 하는 마음이었는데, 하루가 다 가도록 구하지 못하고 배가 가라앉는 장면을 계속 바라봐야만 했어요. 당시 20144월에는, 제 인생에 가장 큰 성취감, 행복감과, 세월호 침몰을 보며 느꼈던 말로 다 표현 못할 슬픔 사이의 감정의 격차가 크게 다가왔어요. 바로 며칠 전 느꼈던 행복감이 죄책감으로 느껴지기도 했고, 내가 변호사로서 이 일에 대해 무언가를 해야겠다, 해야한다는 생각을 계속 가지고 있었어요. 그래서 국회에서 일하던 중 세월호 특조위가 생긴다는 소식을 접하고 조사관에 지원하게 됐어요.

 

세월호 특조위 같이 어떤 사건을 국가적으로 해결할 필요가 있을 때 위원회가 생기곤 해요. 사회적참사 특별조사위원회나,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등등. 이런 위원회에서 일을 하면 역시나 변호사로서 훈련되었던 여러 가지 기술들이 도움이 돼요. 우리가 기록을 검토하고 서면을 작성하고 판례를 분석했던 모든 경험들이 조사위원회에서 일하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역량이 되는 것 같아요. 저는 개인적인 동기로 세월호 특조위에서 일하게 되었지만, 변호사로서 자기가 관심 있는 일이 있고, 그것을 국가적으로 해결하는 일에 함께 하고 싶다면, 그 사건에 직접 들어가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3. 인권센터 

인권센터에서 일하면서도 변호사가 많이 일하지 않는 직역이지만 필요한 곳이라고 느꼈어요. 대학 안에서나 어떤 기관 안에서 사건 처리를 하면 그것이 징계로 이어지고, 징계 결과에 다툼이 생기면 곧 민사소송과 행정소송으로 이어지는데, 이러한 절차적인 문제에 대해 법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 많이 도움이 돼요. 실무를 하다 보면 절차적인 문제는 없는지, 무엇이 인권 침해인지, 무엇이 성희롱·성폭력인지 등에 대한 법적인 이해가 부족해서 어려움을 느끼는 경우가 많아요. 변호사들이 이런 현장에 들어가면 실무에서 많이 도움을 요청하시고, 실제로 많은 도움이 되기도 해요.

 

제가 그동안 다양한 곳에서 일하면서 느낀 점을 정리하자면, 현재는 변호사가 별로 없지만 변호사가 들어가서 일할 수 있는 다양한 직역과 역할이 정말 많다는 것이고, 그런 곳을 잘 찾아간다면 자신만의 전문성을 키울 수도 있다는 거예요. 꼭 송무만이 아니더라도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지면 좋겠어요. 이게 로스쿨 도입 이후 변호사들이 사회적으로 해야 될 역할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Q. 다른 활동을 이어오시다가 공익법률센터에서 근무해야겠다고 생각하신 계기는 무엇이었을까요.
공익법률센터에서 공익 소송도 수행하고 학생들과 함께 활동도 할 수 있는, 이 두 가지를 다 할 수 있는 게 장점이라고 생각했어요. 한편으로는 제가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하고 있고 해서 학교에 대한 친근한 마음이 있기도 했고요. 그리고 지금까지 제가 경험했던 다양한 경로와 활동을 바탕으로 학생들과 함께 공익적인 활동을 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의미 있는 일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Q. 공익법률센터 소속 변호사의 삶은 어떤지 궁금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고 계신가요? 이전에 기대하던 모습과는 같은 점이 많을까요, 다른점이 많을까요? 

저는 공익법률센터에서 프로보노 업무를 담당하고 있고, 법률 봉사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운영하는 일을 주로 하고 있어요.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하계 방학기간 동안 운영되는 프로보노 프로그램들을 다양하게 기획하고 운영하고, 학생들이 직접 기획한 프로보노 프로그램을 지원하는 역할도 하고 있어요. 하계 프로보노는 주로 1~2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장애, 여성, 아동, 노동, 난민, 지역사회 취약계층 지원 등 다양한 주제로 법률 이슈에 대한 리서치와 연구, 사건 참여 등 다양한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어요.

시기를 정하지 않고 상시적으로 운영되는 프로보노 프로그램도 있는데요, 이 프로그램은 주로 공익법률센터에서 수행하고 있는 법률구조 사건에 학생들이 참여할 수 있게 하고, 함께 서면을 작성하고 사건 수행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하고 있어요. 이러한 프로보노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운영하면서 전체적으로 총괄하고 있답니다.

 

그 외에 제가 주로 맡은 일은 서울지방변호사회와 공동 주최하는 예비법률가 공익인권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것이에요. 전국 로스쿨 대상으로 하는, 일종의 서울대 동계 공익법무실습의 전국 버전을 제가 담당하고 있죠. 그리고 또 공익사건도 수행하고 있어요.

공익법률센터에서의 일들은 자유도가 높고, 제가 가진 장점들을 살려서 기여할 수 있는 부분도 많은 것 같아요. 공익법률센터에 계신 다른 변호사님들도 본인들의 관심 주제에 대해서 다양한 방식으로 프로보노 활동으로 연결 지을 수 있고, 결정과 수행 과정에서 자유롭게 논의하고 함께할 수 있는 분위기도 좋다고 생각해요.



Q. 공익법률센터에서 1년 반의 시간을 보내시면서 뜻깊었던 일이나 기억에 남는 일이 있으실까요? 

제가 센터에 와서 처음 수행했던 미성년 자녀의 성본 변경 사건이 기억에 남아요. 사건 자체가 법리적으로 어려운 건은 아니었지만 센터에서의 첫 사건이기도 했고, 사건본인과 그 가족들을 보며 변호사로서 공익적인 사건을 수행한다는 것의 의미를 새삼 깨닫게 해주었던 것 같아요.

 

사건본인은 아버지가 다른 언니가 있었는데, 언니와 성이 다른 것 때문에 굉장히 속상해하고 학교생활도 자신감 없어 했어요. 처음 사건을 시작할 때 수월하게 인용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친부가 반대하면서 가사조사가 잡히게 되었는데 사건본인과 아이 엄마가 혹시라도 성을 못 바꾸게 될까봐 굉장히 마음 졸여 하더라고요. 심문기일에는 사건본인이 편지를 써서 봉투에 넣고 스티커를 붙여 봉한 다음에 엄마도 읽어보지 말고 아무도 보지 말고 판사님만 보세요.” 하며 보내기도 했어요. 아이의 바람과는 달리 재판부에 제출하려면 어쩔 수 없이 뜯어서 스캔해야만 했는데, 그 편지 안에 어린 아이가 크고 삐뚤삐뚤한 글자로 엄마와 언니와 같은 성을 쓰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 놓은 것을 보고 마음이 찡하기도 했어요.

 

결과적으로 청구 인용 되었고, 나중에 가족들이 다같이 센터에 찾아와 너무 고맙다고 인사를 했는데 그때 보람이 많이 느껴졌어요. 아이 엄마는 이혼을 하고 전 남편과 여러 법적 다툼을 하며 아이들의 성이 달라지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법적 절차를 통해 대응해도 이길 수 없을 것이라는 무력감을 많이 느끼셨대요. 하지만 아이 성본변경 청구가 인용되자 이렇게 법을 통해 원하는 바를 이룰 수도 있구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과 아이들을 위해 도움을 주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셨다고 저에게 말씀해주셨어요. 이 이야기를 듣고, 변호사로서 대리하는 것은 작은 사건 하나지만, 아이 한 명의 성장과 그 가족의 평화에 큰 영향을 미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또 최근 하계 프로보노 프로그램을 통해 자립 준비 청년들 대상으로 법률 교안을 만들고 로스쿨 학생들과 함께 교육을 진행하고 있는데요, 그때 받는 피드백들도 뜻깊었어요. 얼마 전에 교육했던 자립 준비 청년들은 20대 초중반쯤 되는 분들이었는데, “지금 당장 법적 문제를 겪지 않더라도, 우리들을 생각해 주는 사람들이 있다라는 걸 느끼게 해줘서 너무 고맙다.”고 하더라고요. 저 역시 마음이 따뜻해지는 반응이어서 기억에 남습니다. 

 



Q. 최근 공익법률센터에서 진행한 난민인정 사건이 언론 보도가 되며 화제가 된 바 있습니다. 당시 사건이 어떻게 진행된 것인지 혹시 설명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우선 사건에 대한 간단한 소개부터 하자면, 파키스탄 국적의 부부가 집안에서 정해주는 대상과 결혼하지 않고, 서로 사랑해서 결혼하였다는 이유로 폭행, 감금, 납치 시도, 살인 위협 등 박해를 받게 되어서 난민 인정 신청을 한 사건입니다. 원고1은 우리나라에서 대학원을 다니며 유학 중이던 분이었고, 파키스탄에서 원고2를 만나 사랑에 빠져서 원고2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하였고, 박해가 계속되자 함께 한국으로 들어오게 되었죠.

 

이 사건의 법적 쟁점을 소개하자면, 난민법 제2조에 난민 인정 사유로 열거된 인종, 종교, 국적, 특정 사회집단의 구성원인 신분 또는 정치적 견해를 이유로 박해 받을 수 있다는 공포중에서 원고들이 특정 사회집단의 구성원 신분에 해당하는지가 중요하게 다투어졌던 사건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지금까지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박해의 위험이 있는 경우, 여성 할례를 당할 위험이 있는 경우를 대법원 판례로 특정 사회집단 구성원 신분을 인정한 사례가 있었고, 명예살인 위협은 지금까지 인정된 사례가 없었어요. 명예살인 위협에 대해서는 소수의 가족 구성원의 사적 보복이며, 국적국의 사법 체계 안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이 대다수였거든요.

 

이 사건은 결과적으로 원고들이 카스트가 다른 사람들끼리 집안에서 반대한 결혼을 하여파키스탄의 사회규범을 어긴 사람들로서 구분되는특정 사회집단 구성원 신분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 받았고이것에 대해 국적국이 효과적인 보호를 하지 못하고 있음을 인정 받아서 최종적으로 난민으로 인정 되었습니다.

 

저는 센터에 들어와서 곧 이 사건의 항소심 항소이유서 제출 단계에 합류했는데사실 주변의 다른 변호사님들이 이기기 어렵겠다는 반응을 많이 보이셨어요원고들의 사정을 보면 본국에 귀국했다간 아이들을 포함해 누군가 살해를 당하거나 크게 다칠 수도 있는 위험이 컸기 때문에어떻게든 끝까지 최선을 다해보자는 마음으로 사건에 임하게 되었어요.

 

명예살인 위협을 받는 원고들이 특정 사회집단 구성원 신분에 해당한다는 점을 입증하는 데에 정말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공익법률센터 공익조교들을 포함해 프로보노 참여 학생들까지 많은 학생들도 합심해서 파키스탄 자료를 비롯해 해외 문헌들을 광범위하게 수집하고번역하고정리해서 제출했어요항소심 진행 중 UNHCR(유엔난민기구)에도 파키스탄의 이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 중에 가족이 반대하는 결혼을 해서 명예 살인 위협을 받았다는 이유로 난민이 인정이 된 판례들을 달라고 사실조회신청을 하였고다행히도 미국과 호주 등에서 원고들과 매우 유사한 상황에서 난민 인정을 받은 판결문들을 다수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이것을 전부 번역하고 법리를 분석하여 항소심 재판부에 제출하였는데이 주장이 어느정도 설득력이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항소심 재판 말미에 원고1이 그동안의 힘들었던 속내를 드러냈던 적이 있었어요원고1은 파키스탄에서도 대학원을 졸업하고 좋은 직업을 가지고 있었고한국에서의 유학 후 더 나은 삶을 꿈꾸던 나름 장래가 유망한 사람이었습니다하지만 가족들의 살해 위협으로 본국에 돌아갈 수 없게 되었고한국에서는 난민신청을 했지만 체류자격조차 주어지지 않아(원고들은 난민신청자들에게 부여되는 G-1 비자 신청도 거부당했고단순히 출국유예만 받고 있던 상태였습니다합법적으로 일을 할 수도 없었어요아이들이 태어나 부양해야 할 가족들이 있는데 힘들고 위험한 단순 일용직만 겨우 조금씩 할 수밖에 없었죠원고1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했다는 이유로 한순간에 모든 미래를 잃어버리고 비참한 삶으로 전락했다는 생각에 심한 좌절을 느끼고 우울증을 앓기도 했다고 했어요동시에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을 원망하게 됐던 자신의 마음에 죄책감도 느껴졌다고 해요.

 

원고들을 생각하면 정말 이분들이 한국에서 안정적으로 살 수 있으면 좋겠다라는 바람이 컸어요그렇지만 또 한편으로는 한번도 명예살인 위협으로 난민 인정된 사례가 없었던지라 이 사건이 질 수도 있다는 불안감도 같이 가지고 있었어요항소심에서 지더라도 대법원까지할 수 있는 한 끝까지 최선을 다해보자는 생각이었죠정말 너무나도 다행스럽게도항소심에서 저희가 승소했고얼마 전 대법원에서 확정되었습니다대법원에서 혹시라도 파기될까봐 마음 졸이며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방어했었어요정말 집요할 정도로 피고의 주장 하나 하나에 반박했던거 같아요(웃음)

 

어려운 사건이었지만서울대 로스쿨 학생들과 같이 힘을 모아서 했던 사건이라서 뜻 깊었고항소심 재판부에서 난민 판단과 관련하여 좋은 검토들을 많이 해주어서 난민 관련 법리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었을 것이라 생각하니 뿌듯했고무엇보다도 원고들이 아이들과 함께 한국에서 평온하게 살 기반이 마련되었다는 점에 너무나도 큰 안도감이 들었던 사건이었습니다.



Q. 정말 많은 보람 있는 일을 하신 것 같습니다앞으로 공익법률센터에서 하시고 싶으신 일이나계획하신 방향 등이 있으실까요?

공익법률센터 법률구조는 기존 법률구조 체계 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각지대에 있는 분들도 도움을 드릴 수 있다는 게 장점인 것 같아요특히 저의 계획은 자립 준비 관련된 이슈에서 사각지대에 있는 사건들을 도와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에요.

그리고 서울대 로스쿨 학생들이 정말 뛰어나고 훌륭한 학생들이거든요그래서 교육이든지 사건이든지 간에 이 학생들이 법조인으로서 공익적인 기여를 같이 할 수 있게 도우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Q. 마지막으로 로스쿨 학생들에게 하고싶으신 말씀이 있으실까요?

아마 전부는 아니겠지만 지금 로스쿨에 재학 중인 학생들 나이가 제가 사회생활 처음 시작했던 나이와 비슷한 것 같아요그래서 그 시절 제가 했던 고민들과 유사하게여러분도 진로에 대한 고민이 되게 많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어릴 적부터 꿈이었던 기자를 그만두고 로스쿨에 진학하기까지이게 내 길이 아니라는 걸 인정하는 것도너무나 매력적이었던 그 명함을 버리기로 결정하는 것도 힘들었어요하지만 그 시기에 스스로에 대한 생각을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이 한 것 같아요그때 제가 제 명함을 들고 진짜 많은 생각을 했어요이 명함이 나한테 어떤 의미인가이게 사라졌을 때 나는 어떤 사람인가내가 살아가고 싶은 삶의 방향성은 무엇인가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은가.

 

어떤 직책직함직역무엇이 되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는 것도 물론 좋지만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나는 어떤 사람이고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살아갈 것이냐 인 것 같아요제 경험을 통해 여러분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혹시라도 자기가 설정했던 경로에서 이탈하거나 거기에 도달하지 못했다 하더라도그게 어떻게 보면 인생의 좋은 경험이거나 더 좋은 삶을 위한 단계일 수도 있으니까 좌절하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거예요저처럼 지금까지 꿈이라고 생각했던 일이 막상 해봤을 때 안 맞을 수도 있거든요그래서 때로는 멈추거나 그만두는 용기도 필요하다라는 말을 해주고 싶네요.

열리지 않는 문을 열기 위해서 너무 괴로워하고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고 자기를 비하하는 것보다때로는 나를 위해 열려 있는 문들이 있다면그냥 그곳으로 가 보는 용기를 가지라고 말해주고 싶어요제가 살다 보니까 정말나를 기다리며 열려 있는 문도 있고애써 두드리지 않아도 열리는 문도 있더라구요그래서 너무 나는 이 방향으로 이렇게만 나아갈 거야나는 이 길에서 전문가가 될 거니까 이런 커리어를 쌓아갈 거야.”라고 하진 않았으면 좋겠고좀 더 마음 편하게 나아가도 된다는 말을 해주고 싶었어요.

 

 
 

마지막으로 건강 관리제가 학생들 만나면 항상 이야기하는데언젠가 훅 가니까” 지금 20대 때 건강하다고 방심하지 말고 꼭 건강 잘 챙기세요.

 

 
 

인터뷰어 : 양현준, 신유준 공익조교 (법학전문대학원 2학년)



 

  • 등록된 첨부파일이 없습니다.